벽라춘(碧螺春)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관련된 다른 고사를 살펴보자.
벽라춘이라는 이름만 봐도 차의 모양이 상상이 된다.
碧螺라는 말은 청녹, 푸른색의 소라와 같은 모양을 말하는데,
이런 예쁜 이름을 가지기 전, 벽라춘의 원래 이름은 혁살인향(嚇煞人香)이었다고 한다.
뜻은 “사람을 놀라게 해 죽일 정도의 좋은 향”이라는 뜻인데,
아무리 좋은 향이라고 해도 이름 한번 고약하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동정산의 벽라봉에서 차를 따는 아가씨들은 모두 저마다의 바구니가 있다.
따낸 생엽을 담아두는 바구니인데, 대나무로 만들어서 통기성이 좋은 것이 특징이다.
아침 일찍 올라가서 채엽을 시작하면 오후 늦게나 돌아오는데,
하루 종일 채엽하다 보면 바구니를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양이 많을 때도 있다.
그렇다고 따낸 이파리를 억지로 바구니에 쑤셔 넣을 수 없는 일.
넘치는 이파리는 그녀들이 곱게 품어서 가지고 내려왔다고 한다.
이때 생엽(차나무에서 따낸 이파리, 가공을 거치치 않은 찻잎을 말한다)은
일련의 화학변화가 발생하게 되는데,
그 변화 과정을 검증된 과학적인 방법으로 살펴보자.ㅋㅋㅋ;;
생엽에는 약80여 종류의 방향성분이 들어 있다.
방향성분은 대게 글리코시드 형태로 고정되어 있지만,
가수분해효소의 작용으로 분해되고, 수분의 증발과 함께
바깥으로 발산되는 휘발성을 되찾게 된다.
생엽에 가장 많이 들어 있는 방향성분은 리프알코올이라고 부르는 물질이다.
전체 방향성분 중6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니 좋은 차를 만들려면
리프알코올의 변화를 잘 다룰 줄 알아야 한다.
리프알코올은 농도가 진할 때 강렬한 풀 비린내를 가지고 있다.
길가에서 볼 수 있는 풀을 뜯어서 손으로 비빌 때 맡을 수 있는 냄새를 떠올리면 된다.
하지만 비린내가 강한 리프알코올도 농도가 희석되면 높고 깨끗하며
상쾌한 꽃향기(청향)와 비슷한 향이 나게 된다.
아가씨들의 더운 체온이 품에 있던 생엽 내의 수분증발과 가수분해효소의 활동을 가속시켰을 것이고,
풀 비린내가 나던 진한 농도의 리프알코올은 희석이 되었을 것이다.
리프알코올 외에도 차의 향기를 이루는 방향성분은 꽤 많은 종류가 있는데 잠깐 살펴보자.
벤질알코올(benzyl alcohol): 사과 향
펜에틸알코올(pheneethyl alcohol): 장미 향
페닐프로페놀(phenyl propanol): 수선화 향
리날로올(linalool): 백합꽃 혹은 옥란화(목련꽃) 향
게라니올(geraniol): 장미향
등등…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성분이 있다.
막 따낸 생엽을 아가씨들이 따서 품에 품어서 내려왔고, 품 안에서는
위에 써놓은 화학변화가 생엽에 발생해서 수 많은 방향성분이 만들어졌으니,
사람들을 스쳐 지나갈 때 마다 아가씨들 몸에서 뿜어져 나온 향이 얼마나 좋았겠는가!
마을 사람들은 아가씨들에게서 나오는 향이 정말 좋아서 사람을 놀래켜 죽일 정도의 향이
나온다는 의미의 지역 방언인 혁살인향이라고 했다.
이런 이름이 완성된 벽라춘의 아름다운 외형과 맛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는데, 문화, 예술 방면에 조예가 깊고, 차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던
청나라의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다.
당시의 야사를 기록한<청조야사대관>이라는 고서에 벽라춘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나온다.
강남지역(한국의 강남 아님;;)을 순시하던 강희제는 동정산에 도착하게 된다.
차에 관심이 많던 강희제는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가늘고 어린 이파리에
하얀 솜털이 가득한 차를 만나게 된다.
이 차의 이름을 물었더니 지역 사람들이 말하길 “혁살인향”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강희제가 생각하길 “혁살인향”이라는 이름은 별로 우아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좋은 이름을 지어주려고 했다.
가만히 생각하던 강희제는 차의 모양도 소라(螺)처럼 굽었고, 차가 나오는 지역도
동정산의 벽라봉에서 나온다고 하니,벽라춘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릴 듯 하여
혁살인향을 벽라춘이라는 이름으로 바꾸도록 명한다.
탄생에 관련된 저번 포스팅은 드래곤판타지 풍의 이야기였다면,
이번 포스팅은 고서에 기록된 검증된 내용이다.
강소성 동정산에서 나오는 품질이 뛰어난 녹차인 혁살인향은 강희제를 만나
벽라춘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